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의문점 (문단 편집) ==== 또 다른 가설들 ====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19일 사망자는 김경철, 김안부 등 '''2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 북미한국인권문제연합회장이었던 페기 빌링스는 '''5월 19일에만''' 자신이 본 시신(corpse, dead body)의 수가 무려 '''200구'''에 달한다고 증언했다. >On May 19. Students were stripped, their hands tied behind their heads and were made to sit on the road where everyone could see them with their heads between their legs for two or three hours. '''The paratroopers began shouting (in Kyungsang province dialect) "Let's kill the Cholla province bastards and then get out of here."''' Many were killed and injured. '''I counted 200 corpses.''' Other witnesses and rumors put the number much higher but '''I myself counted 200 dead bodies.''' >---- >5월 19일이었다. 학생들이 발가벗겨지고 두 손이 뒤통수에 결박된 채 길바닥 위에 꿇어앉아있었다. 그것도 시민들이 대놓고 볼 수 있는 곳에서 2~3시간 동안 두 다리 사이에 머리를 처박은 채였다. '''공수부대원들은 경상도 사투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전라도 놈들은 다 죽여버리고 가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난 200구의 시신을 셌다.''' 다른 목격자들과 소문들은 더 많이 죽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센 시신은 200구였다.''' >---- >페기 빌링스(Peggy Billings, 전 북미한국인권문제연합회장, 1929~2019) 증언[*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200. 책에는 한국어 번역문도 나와있으나 오역이 많아 정확하게 번역해놓음. 영어 원문은 책에 나온 대로와 동일함.][* 한국 이름은 '변영숙'으로, 1953년 한국전쟁 때 선교사로 한국에 와 사회 복지와 여성,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1975~1990년까지 15년간 북미한국인권연합을 이끌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인권 상황을 미국, 캐나다인들에게 꾸준히 알렸다. 5.18이 진압되고 이틀 후인 1980년 5월 29일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Riverside Church)에서 광주 희생자 추모 예배를 드려서 미국 사회에 처음으로 5.18을 알린 사람이다. 이후에도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촉구하는 활동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 여성, 인권, 통일 운동을 꾸준히 펼쳤다. [[https://www.nocutnews.co.kr/news/5190509|2019년 7월 19일 향년 9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한 날에 200명을 끌고 가 집단 사살을 행했거나, 작전 중 사살 형태가 아닌 연행 후 학살 형태 및 진압봉 및 신체부위 직접 구타를 통한 타살과 총검을 통해 찌르는 척살, 화염방사기나 유탄발사기 사용 등 온갖 비인간적인 행동들이 이 날에 자행되었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